
조선시대에 역병은 단순한 전염병 그 이상이었다. 치료 기술이 부족했던 시대에, 역병은 죽음의 그림자로 인식되었고, 그 공포는 온갖 괴담과 민속 신앙을 낳았다. 병을 옮기는 귀신, 마을을 떠도는 역신, 귀한 이를 지키는 부적과 탈의식, 심지어는 역병의 형상을 한 인형까지. 전염병이 퍼질 때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탓했고, 그들을 달래기 위한 각종 의식과 금기가 만들어졌다. 이 글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민간 설화, 풍속집에 등장하는 역병 관련 괴담과 민속 신앙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병보다 무서웠던 ‘믿음의 힘’과, 시대가 낳은 문화적 대응을 통해 조선 백성들의 공포와 생존의 역사를 살펴본다.
1. 역병귀(疫鬼) – 보이지 않는 병의 실체
조선시대 사람들은 역병이 ‘바람을 타고 오는 병’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바람의 정체는 곧 **‘역병귀’(疫鬼)**라는 귀신으로 여겨졌다.
📌 역병귀의 특징:
주로 밤중에 마을에 나타나 병을 뿌린다고 믿음
사람이나 가축의 그림자를 밟으면 병이 옮는다고 여김
때로는 붉은 옷을 입은 여성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전설 존재
이러한 믿음은 민가의 문 앞에 붉은 천이나 부적을 붙이는 풍습, 또는 마을 입구에 허수아비(역귀막이)를 세우는 문화로 이어졌다.
2. 호환(虎患)보다 무서운 '역환(疫患)'
호랑이보다 역병이 무섭다는 말은 조선 후기 백성들에게는 실감 나는 현실이었다. 특히 ‘마마’라 불린 천연두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퍼지며 신적 존재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천연두를 ‘손님’으로 의인화하여 **‘마마신’**이라 불렀고, 화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레 대했다.
🙏 마마신을 위한 의례:
마마에 걸리면 아이 이름을 ‘돌쇠’, ‘강쇠’ 등으로 바꾸며 약하게 보여주기
병에 걸린 아이 방에 **‘마마님 잘 다녀가세요’**라는 쪽지를 붙임
붉은 옷을 입히고, 거울을 창문에 걸어 마마신을 비추게 함
이처럼 역병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모시고 보내는’ 방식의 민속 신앙이 조선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3. 광대탈춤과 역병 – 병귀를 쫓는 웃음의 의식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 마을 곳곳에서는 탈춤과 굿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탈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병을 몰아내는 주술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 탈춤 속 민속 신앙 요소:
광대가 병귀의 형상을 풍자하며 내쫓는 상징
탈 속 인물이 역병과 관련된 욕망, 권력, 질병을 상징
풍물패의 북소리와 웃음소리는 병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고 믿음
실제로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봉산탈춤 등은 역병 진압을 위한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많다.
4. 역병을 퍼뜨리는 여우 전설 – 민간 괴담 사례
조선 후기 민담에는 ‘여우가 변신해 병을 옮긴다’는 괴담도 존재했다. 여우는 인간으로 둔갑해 마을에 들어오고, 특정 가문의 사람들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괴담 예시 – 《기이한 이야기집》 中
“청송에 한 여인이 밤마다 나타나 아이가 아프고 죽었다. 이후 여우 굴에서 붉은 비단이 발견되었고, 그 옷자락에 병부적이 그려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여성, 짐승, 병이라는 세 요소가 결합된 두려움의 상징이었고, 역병과 성차별적 인식이 결합된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5. 역병과 함께 퍼진 금기 – 하면 안 되는 것들
역병이 유행할 때 사람들은 특정한 행동을 하면 병이 따라온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풍속 자료에 따르면, 대표적인 역병 관련 금기 사항은 다음과 같다:

6. 마을을 지키는 ‘역귀막이’ 인형과 표지판
전염병이 극심할 때, 마을 어귀에는 ‘역귀를 막는 표식’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역귀막이 인형'**이다.
밀짚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을 마을 입구에 세움
인형에는 붉은 천, 부적, 거울을 걸어 귀신을 쫓음
표지판에는 “이 마을은 신령이 지킨다”, “마마님, 여긴 다녀가셨습니다” 등 문구를 써 붙임
이는 조선 사회에서 민간 주도의 역병 방어 체계였으며, 신앙과 공동체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대응 방식이었다.
결론
조선시대의 역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포를 형상화한 존재였다.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병의 원인을 귀신이나 여우 같은 괴이한 존재로 해석했고, 이를 막기 위해 부적, 탈춤, 금기, 인형 등 다양한 민속 신앙적 대응을 시도했다.
그 믿음은 과학적이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불안을 이겨내는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지금 우리가 전염병을 과학으로 대응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해도, 조선시대 사람들의 믿음과 문화는 우리에게 위기 속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버텼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