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천재"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
학문, 예술, 서예 모든 분야에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그는, '천재'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대함을 지녔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다.
완벽할 것만 같던 그의 하루에도 웃음과 실수가 가득했다.
오늘은 위대한 천재, 추사 김정희의 인간적인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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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맛보다 친구를 마신다" — 다도의 달인, 하지만...
추사는 다도의 대가로 유명했다.
흔히 말하는 "찻자리 예법"을 제대로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형식보다 친구를 더 소중히 여겼다.
어느 날, 손님을 초대해 고급 찻잔과 희귀한 차를 준비한 추사는, 차를 내리다가 한 번에 엎질러 버렸다.
모두가 당황했지만, 추사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찻잔은 깨도 좋고, 차는 엎어도 좋다. 오늘은 차 맛을 보려는 게 아니라, 너희와 웃으려 부른 자리니까."
완벽을 추구하던 그조차도, 사람을 먼저 생각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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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사는 삐쳤다?" — 어린 제자와의 삐걱대는 하루
추사는 제자들에게 엄격했다.
그러나 때로는 뜻밖의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한 번은 어린 제자가 추사의 글씨를 보고
"선생님, 오늘 글씨가 평소보다 덜 멋있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순간 추사는 무척 기분이 상했다.
입을 꾹 다물고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황급히 사과하며 "오늘은 비가 와서 먹이 덜 먹나 봐요." 라며 수습했는데,
결국 추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 비 오는 날은 나도 축축해진다."고 말했다.
천재도 때로는 '칭찬받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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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주 유배지의 고군분투 — 외로운 천재의 생존기
추사는 1840년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바람 많고 척박한 제주에서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비루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오히려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집 짓는 법을 알려주었다.
어느 날,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 "선생, 이 고생을 견딜 수 있습니까?"
추사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 "고생이란 것은 밥이 없을 때 걱정하는 것이지, 글을 쓸 수 있는 한 고생이 아니다."
외로운 유배지에서도 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런 태도야말로 진정한 '마음의 귀족'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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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병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다 — 병든 천재의 집념
추사는 말년에 병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손이 떨려 붓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앉은 채로 붓을 움켜쥐고 글씨를 썼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글씨가 흐트러지는 걸 참을 수 없어
손가락을 실로 묶어 고정시킨 뒤 억지로 붓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대표작 "세한도" 역시 이 시기의 작품이다.
몸은 병들었지만, 정신은 더욱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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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가난한 선비, 소를 팔다
추사는 젊은 시절 집안이 기울어 살림이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해진 그는 가족과 상의 끝에 소 한 마리를 팔기로 했다.
하지만 추사는 소를 팔러 가는 길에도 책을 들고 갔다.
길을 걷다가, 잠시 쉬려고 길가에 앉아 책을 읽는데 정신이 팔려버렸다.
결국 소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허겁지겁 소를 찾아 나선 끝에, 결국 멀리 떨어진 논두렁에서 소를 발견했다.
결국 소는 팔지 못했고, 가족들은 한동안 그 얘기를 두고두고 웃으며 놀렸다고 한다.
천재도 일상 앞에서는 허둥대는 한 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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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조선의 천재였다.
그러나 그의 하루하루는 실수, 감정, 외로움, 그리고 웃음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종종 '성공한 사람'을 완벽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위대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실수도 포용하고, 인간적인 나약함도 사랑할 줄 안다.
추사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우리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힘들어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삶의 길 위에서 넘어지고 웃으며, 끝내 자신만의 "세한도"를 완성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천재의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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