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무단통치기(1910~1919) – 칼날 아래 피어난 저항의 씨앗



1편: 무단통치기(1910~1919) – 칼날 아래 피어난 저항의 씨앗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겼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36년에 걸친 치욕의 식민 지배를 시작하게 되며, 그 첫 장은 '무단통치기'라는 이름의 공포로 기록된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자마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 총독으로 무력을 상징하는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하였다. 군인 출신 총독이 지배하는 체계는 단순한 식민 지배를 넘어선,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식민지 경영을 의미했다.
무단통치의 핵심은 헌병경찰제를 통한 공포 정치였다. 일본은 헌병을 전국에 배치해 민간인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사법·행정·군사권을 통합하여 헌병이 판사도 되고 경찰도 되게 만들었다. 민족지도자, 종교인, 언론인 등이 이유 없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형벌은 일제히 강화되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정치·사회 활동을 철저히 차단하고,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한 언론과 출판의 탄압도 병행했다. 대표적으로는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강제 폐간되었고, 사립학교는 해산되거나 일본식 교육기관으로 개편되었다.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우리 민족은 결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은 '의병'들이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그리고 을사늑약을 계기로 무장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1910년 병합 이후까지도 전국 곳곳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그 중에서도 홍범도, 최익현, 신돌석과 같은 이름은 우리 저항의 상징이었다. 특히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북간도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했고, 1920년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조선 민중의 사기를 북돋았다.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운동이 조직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인 조직인 대한광복회는 박상진, 김좌진 등의 인물들이 주도해 무장 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이끌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고, 밀정 처단, 거사 계획 등을 실행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또한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족계몽운동도 일어났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계는 탄압 속에서도 교육과 문화운동을 이어가며 민족의식을 지켜냈다.
이러한 저항의 절정은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확산된 '3·1운동'이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수많은 민중들이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운동은 단순한 집회 수준을 넘어선 전 민족적 각성의 장이었다. 일본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고, 약 7천여 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이들이 부상과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세계에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무단통치기는 암흑기였지만, 그 속에서도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향한 불씨는 끊임없이 타올랐다. 이는 단순한 통치 저항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우리는 결코 조용히 지배당하지 않았다. 도리어 일제의 탄압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저항은 더 치열해졌고, 이는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