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들은 매일 엄격한 일정과 공식 의례 속에서 살아갔다. 그렇다면, 그런 왕은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왕의 술자리에는 정치와 심리, 통치 기술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어떤 왕은 하루 한 잔의 술로 피로를 달랬고, 어떤 왕은 술로 인재를 품었으며, 또 어떤 왕은 술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 오늘은 조선 왕들이 실제로 술을 어떻게, 얼마나 즐겼는지 왕들의 기록과 일화, 실록 속 증언들을 바탕으로 현실감 있게 풀어본다.
1️⃣ 조선시대 왕의 하루, 술은 어디에 있었을까?
왕의 하루 일정은 빽빽했다.
새벽 5시 기상
아침 경연(신하들과 학문 토론)
정무 보고
오후 의례·사신 접견 등 일정
밤에만 겨우 여유가 생김
그런 일정 속에서 술은
하루의 긴장을 푸는 유일한 사적 공간이자,
때로는 정치적 연출의 도구가 되었다.
즉, 왕에게 술이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심리적 이완 + 통치 수단이었던 것이다.
2️⃣ 술을 절제한 왕, 세종과 정조의 음주 철학
세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술을 자주 마시진 않았지만,
의료용 약주를 정기적으로 복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절제의 상징으로,
술을 마시되 절대로 과음하지 않고,
술자리를 정치적 목적에 맞게 활용했다.
그는 “술은 지나치지 않아야 비로소 군자의 즐거움이 된다”고 기록했다.
📌 → 핵심: 정조는 하루 한 잔 혹은 특별한 날만 마심
3️⃣ 술에 취한 왕, 연산군과 인조의 위험한 음주
반대로, 술로 인해 문제가 생긴 왕들도 있었다.
🔥 연산군
하루에도 여러 번 술자리를 벌였고,
궁녀들과 주연(酒宴)을 열다가
무도한 행동과 폭정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
**“술 없이는 하루도 못 지낸다”**는 실록 기록도 있음
😰 인조
정치적 스트레스로 인해
자주 술에 의지했고,
술자리에서 신하들과 감정 싸움이 잦았음
📌 → 인조실록에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정사를 보았다”는 기록까지 존재
4️⃣ 왕은 누구와 술을 마셨을까?
왕은 일반적으로 혼자 마시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인물들과 자주 술을 나눴다:
가장 가까운 신하: 정적보다도 측근과 나눈 술잔은 정치적 신뢰의 상징
문신(文臣): 학문적 담론을 겸한 연회 술자리
외국 사신: 외교적인 상징과 품위 과시용
왕자나 후궁, 중전: 특별한 날, 가정적인 의미로 술을 나눈 기록도 있음
술은 그 자체로 관계 맺기 수단이었고,
왕의 술자리 초청은 특권이자 신뢰의 표시였다.
5️⃣ 왕의 술자리 예절,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에,
왕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도 철저한 규칙이 존재했다.
잔의 크기, 높이, 받치는 자세까지 규정
먼저 마시지 않기, 왕 앞에서는 말 아끼기
왕이 술잔을 건네면 바로 받아야 함
왕이 마신 후 잔을 돌려받는 의식적 절차
즉,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라
의례와 정치, 권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무대였다.
6️⃣ 술로 통치한 왕? – 술을 정치로 활용한 전략가들
✅ 영조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신하들에게 술을 권하면서 친근함을 연출함
이는 갈등 완화 및 충성심 유도 전략이었음
✅ 태종
큰 전쟁 이후 연회 자리에서 술을 내리고,
신하들과 공을 나누며 통합 분위기 형성
술은 상벌의 도구로도 쓰였음 → “전공을 세운 자에게 어주를 하사함”
한마디 : 조선의 왕, 술을 마시되 권력을 잃지 않았다
조선 왕들의 음주 습관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서
정치, 심리, 통치 전략의 일환이었다.
절제된 음주는 왕의 품격을 높였고,
지나친 음주는 왕권을 위협했다.
왕은 술잔 속에서 신하를 품고, 나라를 다스리고, 때로는 자신을 잃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술잔 속에도
그 옛날 왕들의 무거운 한 잔이 스며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