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조선 백성들의 불법 술 문화, 밀주와 밀양에 대해 알아보자

world-history-dadoo 2025. 4. 20. 19:09


조선시대에도 ‘불법 술’은 존재했다. 정부가 금주령을 내리고 술을 통제하려 했지만, 백성들은 결코 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의 서민들은 관청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술을 빚었고, 이런 술은 ‘밀양(密釀)’이라 불리며 음지에서 활발히 유통되었다. 이 밀주의 세계는 단순한 법의 위반이 아닌, 당시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억압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었다. 오늘은 조선 백성들의 숨겨진 술 문화, 그 속에 담긴 인간적인 이야기와 술의 사회적 의미를 함께 살펴본다.

1️⃣ 밀주, 조선 백성들의 삶 속에 숨은 ‘일상’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술은 사치품이 아니었다.

추운 겨울, 몸을 녹이는 유일한 수단

장례·혼례·제사 등 삶의 중요한 순간에 빠질 수 없는 물건

노동 후, 서로를 위로하는 정서적 연결 도구

그런데 나라에서는 곡물 절약, 사회질서 유지, 도덕 규범 강조를 이유로
금주령을 내리고, 술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몰래 술을 빚는 ‘밀양’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밀주 문화의 시작이었다.

2️⃣ ‘밀양(密釀)’이란 무엇인가? - 단순한 밀주가 아니다
‘밀양’은 단순한 술이 아니다.
공식적인 허가 없이 개인이 은밀히 빚은 술을 뜻하며,
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 지하 공간, 창고 등에서 빚어졌다.

밀양은 일반적인 막걸리나 약주뿐 아니라,
**지방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제조된 ‘비공식 전통주’**를 의미하기도 했다.

즉, 이는 술이면서도 문화의 일부이자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이었다.

3️⃣ 밀주의 주요 재료와 제조 방식
밀주의 재료는 대부분 쌀, 보리, 조, 수수, 누룩 등이었고,
기존의 ‘양조장’ 기술을 바탕으로
간소화된 술 빚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보통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술을 빚었다:

곡물을 씻고 찐다

누룩과 섞어 발효시킨다

밀폐된 항아리에 넣고 숨긴다

일정 기간 후 걸러서 마신다

이 과정에서 냄새를 차단하고, 소리도 줄이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정교한 은폐술까지 익혀야 했다.

4️⃣ 밀주 유통과 거래 – 조선판 ‘술 암시장’
밀주는 단순히 개인 소비용으로 끝나지 않았다.

산간 지역에서 생산된 술은 시장이나 포구를 통해 유통되었고

장터에서는 ‘약’이나 ‘누룩’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거래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지방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묵인하기도 했고,
포졸들조차 술 한 사발에 눈감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조선판 암시장은 지금으로 보면 비공식 경제의 활성화 사례였으며,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5️⃣ 금주령을 무력화한 민중의 저항 문화
밀주는 백성들의 조용한 반항이었다.

조선 정부가 도덕을 앞세워 술을 금지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더 은밀하고, 더 창의적으로 술을 빚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밀주를 빚는 날을 공동체 축제일로 삼기도 했고,
술을 매개로 이웃끼리 정을 나누며 연대를 강화하기도 했다.

술은 ‘불법’이 아니라,
삶의 애환을 달래주는 정서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6️⃣ 밀주의 흔적, 오늘날까지 이어지다
놀랍게도 조선 시대 밀주의 제조법 중 일부는
지방 전통주로 계승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강주’, ‘감홍로’, ‘문배주’ 등 일부 전통주는
과거에는 밀양 형태로 숨어있던 술이었고,
근현대에 들어와 합법화 + 브랜드화된 사례다.

즉, 조선의 밀양 문화는 그저 숨어 있던 문화가 아니라,
한국 술의 다양성과 뿌리를 형성한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한마디 : 밀양은 술이 아니라 백성의 저항이었다
조선 백성들의 밀주는 법을 어긴 행동이 아니라
억압 속에서도 삶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 속에는 공동체의 연대, 인간의 감정, 문화적 유산이 모두 녹아 있다.

금주령이 강해질수록, 밀주의 향도 더 짙어졌던 건
조선이라는 유교적 체제 안에서도
백성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들지 않았다는 증거다.




텍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