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 속의 불꽃: 우리가 지켜낸 대한민국』 2편
2편: 문화통치기(1920~1931) – 겉은 유화, 속은 동화의 함정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특히 파리강화회의에까지 조선인의 독립 열망이 알려지자, 일본은 무단통치의 폭력적 이미지가 자국의 국제적 입지를 해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20년부터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새로운 통치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유화’의 탈을 쓴 ‘동화’의 전략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통치 방식이 부드러워졌다. 조선총독부는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 경찰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조선총독도 문관이 임명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언론, 출판, 집회, 교육 등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는 듯 보였으며, 조선인에게도 총독부 관리로의 기회를 줄 것처럼 이야기했다. 실제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같은 조선인 민간 신문이 창간되고, 일부 사립학교 설립이 허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온건한 이미지'를 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전략적 변신일 뿐이었다. 실상은 일제가 조선인의 저항을 회유하고 감시하며,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경찰력은 오히려 더 늘었고, 헌병은 사라졌지만 정보 경찰과 고등 경찰이 등장해 사상과 언론, 교육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신문사는 종종 정간되고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집회는 허가제를 통해 사전에 차단되었다.
특히 ‘문화통치기’의 핵심은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위한 기반 다지기였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을 찬양하고 따르도록 하기 위해, 일본어 보급, 일본 문화 주입, 신사 참배 장려, 유교 및 조선 전통문화 무시 등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문화’라는 이름의 통치는 사실 ‘문화적 식민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조선 청년들 사이에서는 교육의 열풍이 일었다. 일제는 일부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를 조선인에게도 개방했지만, 고등교육기관의 수는 극히 적었고 입학 조건도 까다로웠다. 그러나 조선 청년들은 배움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 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사회운동이 퍼져나갔다. 대표적인 것이 1920년대의 민족운동 3대 노선이다.
첫째는 민족주의 노선이다. 안창호, 이승훈, 김성수 등은 ‘실력양성운동’을 통해 조선인의 자생적 역량을 키우고자 했다. 기업 설립, 교육기관 확대, 언론 발간 등을 통해 민족의 토대를 다지고자 했으며,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 아래, 조선인의 기업을 이용하자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둘째는 사회주의 노선이다. 1920년대 초 러시아 혁명과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며 노동자, 농민 계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노동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등이 조직되었고, 파업과 항의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청년들은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셋째는 민족협동전선 노선이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일제에 맞서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는 1927년 ‘신간회’ 창립으로 구체화되었다. 신간회는 전국적으로 지회를 설립하고, 강연회, 토론회, 계몽운동 등을 펼치며 대중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비록 좌우 연합의 한계와 일제의 탄압으로 1931년에 해산되지만, 그 정신은 이후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화통치기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여성의 사회참여였다. 3·1운동을 계기로 여성의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이 크게 성장하였고, 1920년대에는 근우회와 같은 여성운동단체가 등장했다. 여성들은 교육, 출판, 노동, 계몽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 사회의 근대화와 민주화에도 기여한 중요한 흐름이었다.
이처럼 문화통치기라는 이름 아래 조선은 외형적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더 정교한 식민 통치와 민족 말살의 기초가 놓인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 속에서도 교육과 운동, 기업과 문화 활동을 통해 자립과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칼 없는 전쟁'에 맞선 '의지의 전쟁'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그 시기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우리의 청년들은 연필로 싸웠고, 어른들은 회사를 세워 저항했고, 여성들은 말과 글로 독립을 노래했다. 조용해 보였던 시간 속에는, 격렬한 저항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숨결이 오늘날 우리의 자유와 자존을 가능케 했다.

이 시기는 민족 내부에서 다양한 사상적 갈등도 존재했지만, 전반적으로 '민족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중심으로 연대가 이루어졌다. 문화통치는 일본의 가면일 뿐, 조선인의 저항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